지하철에서 이어폰을 꽂고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문득 떠올린 얼굴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흐릿하고 목소리도 기억 안 나는데, 그 장면만큼은 선명한 그 사람. 아마 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김종욱 찾기〉는 그 감각을 스크린으로 정확하게 옮겨놓은 영화입니다. 인도의 낯선 골목에서 피어난 첫사랑을 십수 년이 지난 서울에서 다시 추적하는 이 로맨틱 코미디는, 보는 내내 저도 모르게 어딘가를 찾고 싶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뮤지컬 원작, 스크린으로 오기까지〈김종욱 찾기〉는 동명의 뮤지컬을 원작으로 합니다. 2006년 초연된 이 뮤지컬은 대학로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으며 누적 관객 수 기준으로 소극장 창작 뮤지컬 중 손꼽히는 장기 흥행작이 되었습니다(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공연을 먼저 본 관객들 사이에서는 "영화..
가장 오래된 친구라면 스마트폰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완벽한 타인〉은 십년 지기 친구들이 한 식탁에 모여 스마트폰을 전부 공개하는 게임을 시작하면서 서로의 민낯이 드러나는 밀실 심리극입니다. 밥 한 끼 자리가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지, 제가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풀어보겠습니다. 밀실극이라는 설정이 왜 이렇게 무서웠나〈완벽한 타인〉은 이탈리아 원작 영화 〈Perfetti Sconosciuti〉(2016)를 한국 아파트 거실로 이식한 작품입니다. 이재규 감독은 원작의 밀폐된 공간극, 즉 단일 공간 안에서 인물들의 충돌만으로 극을 끌어가는 연극적 구조를 거의 손대지 않고 가져왔습니다. 쉽게 말해 카메라가 거실 밖으로 한 발짝도..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처음 틀었을 때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인 줄만 알았습니다. 톡톡 튀는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는 도입부가 그렇게 믿게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중반부를 넘어서는 순간, 제가 그 착각에 대해 제대로 대가를 치렀습니다.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스크린에 붙들려 버렸습니다. 진단 한 마디가 영화 전체를 뒤바꾸다 — 순애보의 시작영화가 밝고 경쾌하게 흘러가다가 갑자기 무게 중심이 기울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젊은 아내 수진(손예진)이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Early-onset Alzheimer's Disease) 진단을 받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란, 통상 65세 이상에서 나타나는 알츠하이머와 달리 40~50대 혹은 그보다 이른 나이에 기억과 인지 기능이 급격히 퇴행하는 질환을 ..
재난 영화가 꼭 거대한 폭발과 특수효과로 승부를 봐야 할까요. 영화 〈터널〉을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전제가 완전히 뒤집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무너진 터널 속 한 남자, 생수 한 병, 배터리 얼마 남지 않은 스마트폰. 그게 전부인데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재난 서사 — 생수 한 병으로 버티는 34일의 기록영화 〈터널〉(2016)은 평범한 자동차 영업사원 이정수(하정우)가 퇴근길에 지나던 하늘재 터널이 갑자기 붕괴되며 홀로 고립되는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국토교통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도로 터널은 2,000개 이상에 달하는데(출처: 국토교통부), 그 평범한 일상의 인프라가 한순간 생사의 공간으로 바뀐다는 설정이 보는 내내 무겁게 짓눌렀습니다.제가 직접 이 영화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몸이 반응했..
집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으십니까. 2013년 개봉한 허정 감독의 데뷔작 〈숨바꼭질〉은 바로 그 감각을 스크린 위에 정밀하게 재현한 작품입니다. 어릴 때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귀갓길 내내 뒷목이 서늘했고 현관문을 열기 전에 두 번은 뒤를 돌아봤습니다. 단순한 호러가 아니라 아파트라는 일상 공간이 공포의 진원지가 된다는 사실이 그 여운을 유독 길게 붙잡아 뒀습니다. 도시괴담이 현실을 건드리는 방식〈숨바꼭질〉의 출발점은 "초인종 옆에 이상한 표식이 그려져 있다"는 도시괴담(Urban Legend)입니다. 여기서 도시괴담이란 특정 사실 여부를 떠나 도시 사회 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며 집단적 불안을 반영하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괴담이 위력을 갖는 것은 그것이 '..
간첩 영화를 보면서 울컥한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냉혹한 공작원이 서울 한복판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뛰며 딸 이름을 중얼거리는 장면에서, 이념이니 국가 안보니 하는 거창한 말들이 한순간에 무색해졌습니다. 2010년 개봉한 영화 〈의형제〉는 그런 영화입니다. 적이었던 두 남자가 같은 지붕 아래 살며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 그 안에 담긴 온기가 꽤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의형제 버림받은 두 남자 — 브로맨스로 읽는 첩보 액션〈의형제〉의 설정은 단순하면서도 의외로 날카롭습니다. 작전 실패로 국정원에서 쫓겨난 전직 요원 이한규(송강호)와, 남파(南派) 임무 도중 조직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공작원 송지원(강동원)이 우연히 같은 집에 얹혀살게 됩니다. 여기서 남파 공작원이란 북한이 대남(對南) 공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