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릴러 영화에서 반전이란 대개 한 번 맞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반전이 끝난 자리에서 또 다른 층위의 감정이 시작됩니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저택을 배경으로 하녀, 아가씨, 백작이 서로를 속고 속이는 이 심리 스릴러를, 저는 첫 장면부터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시각적 쾌감과 서사의 밀도가 이토록 단단하게 맞물린 영화는 솔직히 흔치 않습니다. 미장센이 먼저 말을 건다〈아가씨〉를 처음 보고 가장 먼저 압도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공간이었습니다. 미장센(mise-en-scène)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세트·의상·배우의 위치까지를 통칭하는 영화 연출 용어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미장센을 단순한 배경 장식이 아니라 서사 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밴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밴드가 한 일이라곤 북한 선전 구호를 가져다 드럼을 부수며 노래한 것뿐이었습니다.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는 홍대 앞 인디 씬에서 탄생한 전설적 펑크 밴드 '밤섬해적단'의 파란만장한 활동기를 담은 음악 다큐멘터리입니다. 제가 극장을 나서며 느낀 건 카타르시스였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음악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펑크 록이 법정에 선다는 것의 의미밤섬해적단이 기소된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습니다. 국가보안법이란 대한민국에서 반국가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1948년 제정된 법률로, 북한을 이롭게 하는 표현이나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을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이 밴드는 "서울불바다"라는 북한 대남 선전 구호를 자신들의 밴드명과 노래 제목으로 ..
사랑만 있으면 결혼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영화 〈초행〉을 보고 나서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를 새삼 실감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청춘 커플이 서울의 치솟는 전세값과 임신 소식 앞에서 하나씩 무너져 가는 이야기인데, 관람 내내 가슴 한구석이 콕콕 찔리는 기분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 주거 문제, 영화가 보여준 현실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살 집 한 칸을 구하지 못해 흔들리는 이야기가, 과연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걸까요? 제가 직접 〈초행〉을 보고 나서 받은 첫 충격이 바로 그 질문이었습니다.영화는 수년째 동거 중인 연인이 양가 부모님과의 첫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을 따라갑니다. 서울의 좁고 허름한 자취방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전세 자금을 계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병동 한가운데가 뻥 뚫려 버린 오프닝 장면을 보는 순간, 이게 코미디인지 공포인지 분간이 안 됐습니다. 이옥섭 감독의 장편 데뷔작 〈메기〉(2019)는 거대한 싱크홀과 정체불명의 엑스레이 사진 한 장으로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무너지는 과정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담아낸 작품입니다. 보는 내내 유쾌하게 웃다가, 어느 순간 서늘한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었습니다. 싱크홀이 던진 질문 — 현대 사회의 불안을 시각화하다제가 이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하필 싱크홀인가"였습니다. 그냥 극적 장치로 쓰인 거겠지 싶었는데, 보다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싱크홀(sinkhole)이란 지반이 침식되거나 공동(空洞)이 생겨 지표면이 갑자기 함몰되는 지질 현상을 말..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서울의 밤거리를 걷는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는 퇴근길 교통사고로 유령이 된 공장 노동자 혜정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매일 스쳐 지나가던 골목길이 한동안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유령이 된다는 것, 그게 꼭 비현실의 이야기일까요혜정은 어느 날 밤 퇴근길에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채 인식하지 못한 상태로 유령이 되어 서울의 차가운 밤 속을 맴돌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가 처음 마음에 걸린 건, 그 설정이 너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판타지 리얼리즘(Fantasy Realism)이라는 장르적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판타지 리얼리즘이란 비현실적인 사건이나 존재를 현실 세계에 자연스럽게 녹여 넣어, 오히..
카페 한 공간, 대화 몇 토막, 그게 전부입니다. 홍상수 감독의 〈풀잎들〉은 서울 골목 카페에 홀로 앉은 정희의 시선으로 타인의 사소한 대화를 70분 내내 훔쳐보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작품을 보면서 한 번도 지루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그게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습니다. 흑백과 미니멀리즘이 만들어내는 관찰의 쾌감예술 영화라고 하면 으레 난해하고 지루하다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저도 솔직히 〈풀잎들〉을 틀기 전까지는 그쪽에 가까운 기대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고 나니 그 선입견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이 영화의 핵심 도구는 흑백 화면입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란 불필요한 요소를 극단적으로 제거하고 본질만 남기는 예술적 접근을 말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색채를 걷어냄으로써 관객의 시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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